연주가 곧 있어서 연습 중입니다. 친구하고 베토벤 소나타 열 곡을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일년 넘었는데 이제 끝이 보이는군요. 열 곡이다 보니 연주 세번 중에 한번은 네 곡을 할 수밖에 없는데, 두 번 연주를 하고 보니 1,2,5,10 번 이렇게 남았습니다. 돌이켜보면 5번은 봄에 해야지 하는 생각에 이렇게 됐네요. 봄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은 물론 베토벤이 아니고 악보를 팔기 위한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 에 가깝겠는데, 성공한 셈입니다. 곡이 유명해져서 이름이 붙은 것인지, 이름이 붙어서 유명(이 단어는 아마 이름이 있다는 뜻이죠?) 해진 것인지는… 둘 다겠죠. 어쨌든 이 곡의 첫 멜로디는, 봄 같습니다. 같이 연주하는 친구의 따님은 일곱 살인데, 엄마가 이 곡을 연습하는 걸 들으면 행복해진다고 했답니다.

제가 베를린에서 학교 다닐 때 들은 수업 중 하나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에 대한 세미나였습니다. 한 학기 동안 열 여섯 곡을 듣고 배우고 토론하고, 끝에 에세이도 쓰고요. 가르치는 음악학자 교수님은 아마추어 첼리스트이기도 했는데 음악학이 아닌 악기 전공 학생이 그 수업을 듣는다는 것에 감동하셔서 (실제로 악기하는 사람은 저하고, 바이올린 했지만 결국은 너무 똑똑해서! 학부 졸업 후 의대로 진학한 친구, 둘 뿐이었다는) 학기가 끝나고 저희하고 비올라 교수 한 분을 댁으로 불러서 같이 현악 사중주를 한 적도 있습니다. 즐거웠죠. 아무튼 지금은 제가 썼는지 똑똑한 친구가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에세이의 주제가 ‘베토벤의 바장조’ 였습니다.

베토벤의 작품을 시기별로 볼 때 보통 초, 중, 말기로 나눕니다. 현악 사중주 열 여섯 곡하고 피아노 소나타 서른 두 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현악 사중주 중에 제일 먼저 씌어진 것은 사실 작품번호 18의 1번이 아니라 4번인데, 베토벤은 작품번호 18의 여섯 곡을 발표하면서 어떤 이유로 곡의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현악 사중주 중에 ‘중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곡은 작품번호 59번입니다. 작품번호 18-1번이 바장조이고, 59번도 바장조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곡인 135번도 바장조입니다. 자세한 것은 여기 적을 수 없지만, 세미나에서 내린 결론은 이게 우연이 아니고 바장조는 베토벤에게 중요했다significant는 겁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나디아 불랑제에게서 바흐 평균율의 모든 곡을 모든 조로 옮겨서 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고 합니다만, 적어도 옛날 음악(베토벤의 ‘봄’소나타는 1800년생입니다) 에서 조성은 의미 심장한 문제였고 곡의 성격, 또는 정체성의 일부였습니다. 작곡가는 아마도 고심해서 곡의 조성을 골랐고, (그건 역사적으로 특정 악기들의 배음 구조 때문이기도 합니다) 조성에 어떤 상징성이 결부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20년쯤 전에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다들 크리스마스스러운 바장조, 라고 말하지만 왜 그런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실 크리스마스스러운 바장조라는 말 자체를 그날 처음 들었지만. 샵#이 네 개인 것은 십자가의 상징이라고도 말씀하셨고요. 말씀하시는 분의 열정 때문이었는지 그 말은 두고두고 생각납니다.

그 뒤로 항상 곡의 조성에 대해 깨어 있는 귀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바장조는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봄이란 무엇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죠. 봄은 사람마다에게 다르고 날마다, 시간마다 다른 것인데.

저는 사실 봄 소나타를 연주하는 게 처음입니다. 4악장이 엄청 길고 어려워서 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주가 가까워질수록 어떻게 곡의 시작에 맨 처음 나오는 멜로디를 더 신선하게, 더 자연스럽게, 햇빛 비추듯이, 물 흐르듯이, 그냥,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될 겁니다. 모든 시작이 중요하지만 이건 ‘유명한’ 멜로디이고 듣는 사람의 기대치가 있으니까 왠지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답은 물론 곡 안에 있습니다.  곡과 친해지고 곡이 내 몸 안에 들어오게 하려면, 같이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사진은 2010년? 봄, 노르웨이 Stavanger. 친구가 일년간 그곳 오케스트라에서 일해서 놀러 갔습니다. 배 타고 피요르드를 보러 갔다든가 그런 것도 기억나지만, 정말 편한 친구하고 말 한마디 안하고 그냥 강물에 햇빛 비치는 걸 보면서 앉아 있었던 시간이 제일 소중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