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lf_fittext text=”정답없는 ‘말러 교향곡 4번'” max_font_size=”25″ letter_spacing=”1″ text_transform=”uppercase”]

지난주 연주하러 뉴욕에 왔다. 어제 프로그램은 말러 교향곡 4번, 오늘 저녁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이다. 우연찮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번 주 수요일에 말러 4번을 연주한다. 뉴욕 청중은 원한다면 사흘 간격으로 다른 오케스트라, 다른 지휘자의 말러 4번을 들을 수 있는 셈이다.

날마다 다양한 공연 단체가 경쟁을 벌이는 대도시에서는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있다. 이렇게 되면 그곳에 상주하는 단체는 멀리서 방문하는 단체가 가져오는 신선함과 희귀성을, 방문하는 단체는 상주 단체가 가진 지역에서의 존재감을 의식하며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을 꺼린다. 서로 청중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기획자를 탓하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서 우리가 다 같은 곡들을 연주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계의 공연장을 돌아다닌다면 다들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묻게 되기도 한다.

말러 교향곡 4번은 말러가 1900년에 썼지만 악보와 음악은 다르다. 그가 그려 놓은 기호들은 실제 소리로 바뀌어 연주될 때 비로소 음악이 된다. 지휘자와 연주자, 청중까지 다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 음악이다. 같은 사람이 연주한다 해도 누가 듣느냐에 따라 내용이 다를 것이고, 어떤 공연이든 그 한 번에만 있는 고유함이 있다. 음악에는 정답이 없다. 연주를 누가 ‘더 잘한다’는 비평이 나올 순 있겠지만, 음악 자체에는 없다. 악보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동시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

오케스트라들은 청중에게 살아 있는 음악, 그들만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오늘도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나는 공연장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음악계는 비록 작지만, 사회 전체도 닮은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문화의 꽃은 다양성이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피어난다.